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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에 대한 오해와 진실
관리자 조회수:405
2019-03-04 18:23:27
 
2011년 대한제국 중악 120주년 기념 계룡산 산신제에 즈음하여

▲ 구중회(공주대교수. 계룡산산신제보존회장)

[프롤로그]
금년은 신묘년이다. 그런데 계룡산 중악단이 건립된 것도 신묘년이다. 1891년→1951년→2011년과 순서로 세 번째 신묘년이니, 120년이 지난 셈이다.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금년 계룡산 산신제는 <‘대한제국 중악’ 120주년 기념>이 되었다. 계룡산 산신제의 내용을 운영위원회들과 논의하는 과정에서 ‘대한제국의 성격’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공주 향교 이정우 전교님께서 “‘대한제국은 일제에 야합한 정권’이라는 시각이 일부에 있으므로 먼저 이를 학술적으로 정리해둘 필요가 있다”고 하셨다. 옳으신 지적이셨다.

[본론]
‘대한제국’은 구한말 고종이 ‘황제로 나라’로 건립한 국가이다. 1897년부터 1909년까지 존속하였다. 그런데 대한제국은 ‘불필요한 오해’를 받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대한제국에 대한 ‘오해’는 다음 세 가지 측면에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대한제국 선포 이후 고종과 보수적 통치 세력은 절대 왕정체제를 지향하며, 정치적 측면에서 궁내부 권력을 증가시켰고, 재정 면에서 궁내부의 수입을 증대하였다.
재정 기관의 통일이 아직 정비되지 못한 상태에서 황실의 재정으로 이속시켜 국가재정과 맞먹는 단계까지 이른 것이다. 이 과정에서 ‘국가재정의 궁핍’과 ‘백성民에 대한 가중수탈’이 이루어졌다. 민중들의 경제생활을 어렵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둘째, 대외인식에서 일본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와 인식을 통하여 일본적 아시아 연대론과 유사한 형태를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대외인식은 대한제국이 친일적 성격과 연결시킬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하였다.
셋째, 고종은 나약하고, 우유부단하여 대원군의 ‘완력’과 왕비의 ‘치맛자락’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러한 인식은 식민주의 사관학자들이 줄곧 주장하여 이제 통설이 될 지경에 이르렀다.

이상의 세 가지 측면은 다시 검토해야 할 항목들이다. 황실재정의 확충은 ‘국가재정의 궁핍과 백성에 대한 수탈’이란 결과를 가져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내면을 들어다보면, 고종황제는 제국주의 열강의 경제적 침략의 위기에 대응하여 화폐제도 개혁, 철도 부설, 광산 개발, 학교 건설 등 근대화 사업을 추진하여 민족적 권리방위책을 세우고자 하였다.
외피적으로 보면 대한제국과 독립협회가 추진한 군주주권이라는 점에서 동일하다. 그러나 독립협회는 중추원의 기능을 강화하여 황제의 권한을 견제하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대한제국은 ‘국민국가’를 지향[김신재, <국가형태로 본 대한제국의 국가 성격>]하였다.
고종이 나약하고 우유부단하여 대원군과 왕비의 그늘에 있어서 일본에 대한 대응이 민첩하지 못했다는 것은 거의 ‘모함’ 수준이라 생각된다. 이러한 실체 규명은 최근 서울대학교 이태진 교수에 의하여 단행본이 발간되기도 하였다.

여기서 ‘모함’ 수준이라는 말은 왕비가 시해[1985]되는 현장에 있던 왕이 어찌 나약하고, 우유부단할 수 있겠는가?
정말로 나약하고 우유부단했다면 대원군과 왕비가 없는 상황에서 일제에 의하여 폐위되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죽을 때까지 한을 품고 칼을 갈았을 것이다.
고종 황제는 전환기 시대의 지도자로 비극의 주인공이었다. 고종은 죽어서까지 철저히 일본에 유린당한 황제이다. 조선시대 왕의 장례 기간은 5개월 왕비는 3개월이다. 그런데 고종장례는 12일만에 치러졌다.[구중회,《능묘와 풍수문화》국학자료원:72쪽] 그러한 고종 황제를 일제와 야합한 지도자로 인식한다면, 이는 우리나라의 비극 자체일 수밖에 없다.
《조선의 최후》[2004년:7쪽]의 작자[김윤희, 이욱, 홍준화]들은 고종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가를 내린다.
그가 살았던 시대가 전환기가 아니었다면, 민권을 신장시키고 국민적 합의를 도출하여 변화를 모색해야 할 시기가 아니었다면, 그의 태도를 일방적으로 비난할 수 없다. 그러나 하필이면 그런 시기였기에 고종에 대한 평가는 조금 더 엄정하게 내릴 필요가 있다.
이와 같이 지적하면서 몇 가지 장면을 들었다. 을사조약 전날[1905년 11월 15일 오후] 고종이 이토와 외교권을 논하는 자리에서 “순국할 망정 허락할 수 없소”라고 했다.
조선이 망하던 날[1910년 8월 29일] 지식인 최린의 회고 글에서 조선인민의 조용함을 ‘매관매직의 괴수로 민영환’을 지목했다고 했다. 이러한 역사적 상황에서 고종은 패망의 책임을 모두 떠안은 것이다.
이제 우리는 국제질서의 거대한 파도에 밀려 자기중심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던 황제의 정신을 본받아야 할 것이다. 최근 세계의 중심을 향하여 뻗어가는 ‘한류’가 황제의 꿈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에필로그]
계룡산 중악단은 ‘대한제국’의 사전祀典이다. 전통사회에 있어서 국가의 건립을 위한 필요충분조건의 하나가 사전의 수립이다. 그 중심적인 사전에 계룡산이 중심선에 선 것이다. 일제의 눈을 피하여 서울에 있어야 할 ‘대한제국 중악단’을 조선의 출발지인 계룡산에 세운 것이다.
중악단은 상·중·하의 개념으로 묘향산의 상악단과 지리산의 하악단과 함께 3악이 된다. 현재 상악단과 하악단은 소실되었고, 중악단만 유일하게 남아 있다. 대한제국의 역사적인 현장이라 할 것이다.
이것이 금년 ‘대한제국 중악 건립 120주년 계룡산 산신제’의 의미이다. 그리고 ‘대한제국의 계승지라는 역사적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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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특급뉴스(http://www.expressnews.co.kr) 구중회(계룡산산신제보존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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